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 멸망/창작물 (문단 편집) === 실제 역사 관련 창작물 === 실존했던 국가나 역사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전개와 내용에 있어 작가의 상상력이 많이 들어갔거나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전개를 보인 경우.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 [[청나라]] ||<-2> '''원인''' || || 전쟁 ||'''[[조선|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br]패전 || || 내란 ||태평천국[br]중화제국 || || 내정 ||[[서태후|막장인 지도자]][br]약체화[br]명분 상실[br]분열[br][[민족주의]] || || 재해 ||이형(?)[* 청나라 관점에서는 재앙에 가깝다. 국가가 막장으로 굴러 떨어진 제1차 계기를 제공했으니까.] || 밑의 중화제국보다는 나았지만 청나라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작품 속 주인공]이 즉위하자마자 뜬금없이 청나라를 적으로 선포하고 전쟁을 일으키는데 양쪽이 모두 막장이었으나 청나라는 서태후의 판단 미스와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인해 결국 패전, 땅과 배상금을 뜯겼으며 불평등 조약까지 맺어야 했다. 이로 인해 태평천국은 세력이 더 커졌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홍장이 내려갔더니만 진압하란 반란을 대충 진압해놓고는 '''자신이 황제가 된다.''' 이로서 청나라는 강남을 상실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화제국의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 못해 쩔쩔맸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망 플래그]]였겠지만... '''대한제국의 개입으로 정세가 반전한다.''' 이형은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으로 점령한 후 공친왕을 내세워 친열강, 친조선 정권을 수립했고 이 지원 덕에 청나라는 기사회생하게 된다. 비록 실질적 영토가 허베이성만으로 추락하였으나 일단 생존에는 성공, 게다가 태평천국은 아직 완전히 죽은게 아니라서 중화제국과 걔속 싸웠고 중화제국은 중화제국대로 막장이었던지라 강남의 두 세력이 싸우는 동안 청나라는 간만에 평화를 누린다. 심지어 썩어도 준치라고 이형은 청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청나라랑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오히려 조선이 손해를 본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나 털고 먹었는데도 아직도 청나라는 조선(=대한제국)이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 정도였다는 것[* 물론 이 입장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철회하는데 대영제국이 중화제국에서 벌인 대형 병크로 인해 청나라에서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죽게 될 것 같자 그 여파가 대한제국으로 밀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으로 선회한다.], 여기에 중화제국이 하도 막장이라 사람들은 계속 청나라로 넘어오니 중화제국보다는 유리한 입지를 가진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너진 국가가 기사회생하는 건 어려운 일인지 천명대전에서 청나라의 행보는 이형조차 기가 막혀할 정도로 한심했는데 공친왕이 무능력자는 아니었지만 200만 대군의 침공에도 이형의 최소 기대인 60~70만은 커녕 40만 밖에 모으지 못하고 그나마도 30%는 전쟁중에 탈영하는 한심스런 작태를 보여주었다. 이는 한족의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나 천명을 상실한 것 등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결국 천명대전의 승자는 한청연합군이 되었고 중국이 전국시대화됨으로써 청나라는 중원의 최강국 타이틀만은 쥐며 목숨만은 이어가는 중이다.[* 아무래도 청나라 실권자가 자신이 세우긴 했지만 이형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데다가(마침 또 그렇게 해서 들인 아내는 현모양처에 이미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여인이다.) 본인도 중국을 직접 지배할 생각은 없어서 그런 듯하다.] 국가가 막장이 되긴 했지만 대만, 류큐, 일본보다는 사정이 차라리 나은 편이다(...).[* 대만은 아예 대한제국에서 왕을 모셔왔을 지경이며 류큐는 원래 역사와는 달리 독립국으로 남았으나 영국, 일본, 대한제국의 보호국 신세 여기에 일본은 한국의 반식민지 상태다(...). 그나마 일본만이 자력으로 한국의 영향을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편이다.] 청나라 다음으로 상태가 괜찮은 몽골도 상황이 어찌 될 지 모른다. * [[중화제국(1915~1916)]]† ||<-2> '''원인''' || || 전쟁 ||'''[[대한제국|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br]패전 || || 내란 ||태평천국의 게릴라전 || || 내정 ||일부 지배계급의 부 독점[br]근대화 실패[br]열강의 입김[br]외교적 실패[br]민심 이반[br]군벌 || || 공황 ||빈곤[br]기근 || || 재해 ||[[대영제국]][* 강남 일대를 휘몰아친 대기근의 주범] || 막장으로 굴러떨어진 [[청나라]]에게서부터 [[이홍장]]이 주위 사람들과 열강들의 부추김을 받아 건국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중원의 세 국가(중화제국, 청나라, 조선)중 최강자 타이틀을 가졌지만 태생부터가 열강의 입김이 있던지라 아예 건국하면서부터 타이완을 영국에 떼주며 시작한 취약한 왕조였다. 비록 한족 중심의 국가이기에 민심을 다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청나라는 만주족-한족 대립으로 시끌시끌한데다가 지배범위가 허베이성에 국한된 중화제국보다도 더 취약한 상황이었지만 중화제국은 이 유리함을 살릴 기회가 없었다. 중화제국 황제 이홍장은 근대화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 있었지만 조선과는 달리 그것이 쉽지 않았다. 지방 지주들이 근대화에 호의적이지 않았기에 근대화는 지지부진했고 애당초 이홍장의 지지기반이 기득권층이니 근대화가 잘 될 수가 없었다.[* 구 기득권층을 싹 갈아엎을 수 있던 이형과는 다른 점] 중화제국은 국가 개혁-외세 몰아내기-청나라 타도 요 3단계를 국가목표로 삼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조선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었고 청나라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었으며 열강들도 프랑스가 조선을 후원하는 수준만큼 후원해준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청나라에는 친열강, 친조선 정권이라 할 수 있는 공친왕 정권이 들어섰으니 청나라를 노리기도 어려워졌다. 여기에 내적으로는 근대화의 실패는 결국 지주들의 수탈로 이어졌고 그로 인한 태평천국의 게릴라 활동 등으로 나라는 불안불안하게 굴러갔다. 근대화를 바라는 지식인들은 날이 갈수록 나라에서 등을 돌리고 대한제국에 우호적인 시선을 보이는 [[매국노]]가 되어가는 등 내적으로도 나라는 망가져가고 있었다. 그나마 모든 면이 청나라 시절보다 못해도 군사력만은 숫자로는 대한제국보다 우위였기에 외부에 의해서 무너지진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중화제국에 큰 타격을 먹인 사건이 벌어졌으니 1870년 즈음 '''풍년이 들었는데도 기근이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전적으로 대영제국과 지주의 탓으로 그들의 큰 욕심을 위해 농민들을 희생시키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게 '''동아시아 일대에 큰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형은 이게 애당초 그렇게 파란을 일으키리란 것을 내다보았지만 중화제국에서는 잘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 결과 민심은 중화제국에서 더더욱 떠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중화제국은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성이 생겼고 그 결과 청나라 더 나아가 대한제국과 맞짱을 떠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중화제국 멸망전인 '''천명대전'''이 발생한다. 이 직전 중화제국은 그렇게 사이 안 좋던 태평천국과 오랑캐 타도라는 공동목적 하에 임시 휴전을 맺기까지 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였고 병력도 200만이나 모았지만 이들 대다수는 병농일치체제하에 온 것이라 많은 숫자가 농부(...) 결론적으로 병력은 많지만 질이 떨어진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인지 첫번째 벌어진 해전마저 프랑스 해군과 연합하긴 했지만 청나라에게조차 패전을 하였다(...) 그나마 청나라가 워낙에 막장을 달리고 있어 병력이 꼴랑 40만밖에 안 되고 그나마도 별 거 아닌 것이[* 실제로 황하회전에서 청군은 3할이나 탈영해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유일한 위안거리였겠지만 이형은 이 사태를 중화제국의 사정이 극히 나쁨을 이용 황하회전에서 [[사면초가]] 전략을 사용해 끝내는 내부에서부터 있던 문제점이 폭발해 중화제국군은 그대로 사분오열된다. 첫 전투에서만 중화제국군이 9만명이 죽었는데 한청연합군은 고작 600명밖에 못 죽인 졸전중의 졸전을 기록했는건 물론 사면초가에 걸리자 전투에 참여한 군벌들은 자기네들 사정도 급해 이홍장에게 제대로 된 지원도 못 해주고 농민으로서 징집된 이들은 탈영을 시도해 무려 '''20만명'''이 탈영하고 이후의 전투에서도 연전연패 심지어 태평천국은 대한제국과 몰래 연락하기까지 하는 총체적 난국 현상에 빠진다. 여기에 이형은 스스로를 천자가 아닌 카칸이라 칭하며 중화제국의 정통성을 흠집내고... 중화제국에서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결국 황하회전 막판에 이형과 그 1만 6천의 기병과 닥돌전술을 감행 '''이홍장의 목을 베어버림으로서''' 중화제국은 멸망 이후 9개의 번국으로 쪼개진다. * [[태조 왕건]] - [[태봉]]국† ||<-2> '''원인''' || || 전쟁 ||[[궁예(태조 왕건)|정신나간 지배자]]의 지나친 전쟁 확대[br]전쟁 준비로 인한 내정 피폐 || || 내정 ||지나친 지출로 인한 재정 파탄[br]지배자의 중병 및 광기로 인한 통치의 마비 || || 공황 ||지배자의 착취 및 수도 이전으로 인한 호족들 간의 국론 분열[br]지배자의 민간인, 포로 학살[br]지나친 신격화로 인한 종교계의 반발 및 정부의 종교 탄압 || || 재해 ||철원 지역의 기근, 역병, 가뭄 || 태봉국은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이지만, 드라마 상에서 태봉국을 묘사하는데 있어, 작가의 창작과 상상력이 많이 들어가 있다. 궁예가 송악에 후고구려국을 건설 했을 때만 해도, 궁예는 성군의 자질을 보였고 국가 내에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지태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궁예는 북벌을 망상하며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다. 그런데 나주 전투등으로 인해 국고 지출이 많은 상황에서 수도를 옮기니 국고는 바닥나버리고, 민생은 파탄 나는 지경에 이르었다. 게다가 아지태는 황궁의 거대함만 추구할 뿐 철원 자체의 인프라 구축에는 무관심하였기에, 철원 지역은 주민들이 아사하고, 식수도 부족한데 역병이 도는 지경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궁예는 무리한 북벌 계획을 추진하면서 군사 규모를 무리하게 늘렸고, 백성들은 가혹한 수탈과 부역에 시달리게 된다. 궁예가 엇나가기 시작하면서 국론과 통치도 엉망이 된다. 궁예가 아지태를 지나치게 밀어주면서 호족들간의 국론 분열이 시작되었고, 궁예가 정신병을 앓으면서 온갖 실정을 해대는지라,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통치체계도 마비가 되어버린다. 물론 왕건의 활약으로 인해 후백제와 전쟁에서는 태봉국이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후백제는 몇 번 패배하여도 그 것을 만회할 국력을 가지고 있던 반면에, 태봉국은 병사들 훈련할 돈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 한편 태봉국의 벼슬아치나 높으신 분들 마저도 지배자의 광기, 그리고 태봉국의 기형적인 정치체계로 인해 크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심지어 파리목숨처럼 죽어나가는 지경에 이른다. 임금이 불가능한 북벌을 준비한답시고 병부령, 광치나 같은 고위직들을 들들 볶거나, 조회에서 기침소리를 냈다고 신하를 공개처형 하거나, 갑자기 죽은 사람이 보인다고 수 많은 신하들의 부인을 때려죽이는 등, 신하들 마저도 살얼음판에 걷는 듯한 긴장속에서 생활해야했다. 때문에 신하들과 호족들은 벼슬을 떠나 잠적해버리거나(박유), 고위직을 맡기 꺼리거나(왕평달, 박지윤, 복지겸, 원극유 등), 갑갑한 철원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전선에 나가길 선호하는 등(복지겸, 왕건 등), 굉장히 좋지 못한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황후와 두 태자가 처형당한 뒤 궁예는 또다시 무리한 전쟁을 진행하였으나, 결국 4기장이 왕건을 추대하며 역성혁명을 일으키면서 태봉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 [[황후의 품격]] - [[대한제국]]† ||<-2> '''원인''' || || 내란 ||반황실 결사단체 ([[변백호]], [[천우빈]])[* 심지어 황족까지 [[이윤(황후의 품격)|가담자]]가 있었으며, 황실을 지키는 경호대조차 상당수 포섭되어버린 상황이었다.] || || 내정 ||'''막장인 지도자 ([[태후 강씨]], [[이혁(황후의 품격)|이혁]])'''[br]'''황실 구성원의 범죄와 부패'''[br]이반된 민심[br]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상태인 지도자 ([[이혁(황후의 품격)|이혁]], [[태황태후 조씨]]) || || 재해 ||'''__[[태후 강씨|강은란 그 자체]]__''' || 현실의 대한제국이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난관을 잘 버텨내고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국가 전반적인 면에서는 제법 원만한 모습을 보였으나, 체제에 한정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상황. 황제인 [[이혁(황후의 품격)|이혁]]과 태후 [[태후 강씨|강은란]]은 엄청난 비자금을 착복은 물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온갖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전개된 내용 상 황실에 대한 반대의견도 사조직을 이용해 탄압했던 듯.[* 1화에서도 심기를 거스른 질문을 한 기자를 이혁의 심복 마필주가 구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황실에 대해 분개한 사람들도 제법 많았으며, "독수리"라는 반체제세력까지 결성되어 활동하던 상태. 막판에 황제와 태후의 비리와 죄상이 일명 ''''황실의 양심[* [[소진공주]] 제외]''''들인 [[오써니]], [[오금모]], [[강주승]], [[민유라(황후의 품격)|민유라]], [[아리공주]] 등에 의해 상당수가 공개되었고, 자신의 악행을 뉘우친 황제는 태후의 결정적인 비리의 폭로를 지원하고 숨을 거뒀다. 결국 태후는 자신의 악행을 도와준 [[서강희]]와 자신의 개인 비서와 함께 구속 수감되었으며, 대한제국은 해체되어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유럽#s-1.4|부르군트 기사단국]]†♨ ||<-2> '''원인''' || || 전쟁 ||'''흑색 상황 [br] OFN의 침공''' || || 내란 ||붉은 양귀비 저항군 [br]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이벤트#s-2.23|부르군트의 봄]]''' || || 내정 ||'''극단주의 세력의 만연'''[br]'''종교 및 사상에 대한 극단적 탄압'''[br]'''비현실적인 국가 목표'''[br]'''[[나치 독일|너무]] [[미국|강한 적]]''' || || 공황 ||국고 고갈[br]부도덕한 부유층 창궐 || |||| '''결과''' || || 멸망 ||'''국치, 분열''' || 부르군트가 설립된 이유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독일의 경제 및 외교적 상황이 악화되자 국가사회주의마저 퇴폐적이라고 주장하며 '부르군트 체제(burgundian system)'라는 이념을 도입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던 SS 세력의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히틀러는 독일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하인리히 힘러]]를 프랑스 및 벨기에 지역을 통치하게 만들어 중앙 정계에서 배척시킨 것이 국가의 설립 배경이다. 이로 인해 부르군트 기사단국이 설립되었지만, 설립 배경과 그 지도층마저 극단주의적인 사상으로 인해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1970년대 즈음에 붕괴하게 되거나, 붕괴를 막더라도 상당한 위기를 겪게 된다.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유럽#s-2.11|카우카지엔 국가판무관부]]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남아프리카#s-4.1|대아프리카 국가령]] ||<-2> '''원인''' || ||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 || || 내란 ||각지에서 발생하는 봉기 || || 내정 ||'''극단주의 세력의 만연'''[br]'''종교 및 사상에 대한 극단적 탄압'''[br]'''비현실적인 국가 목표'''[br]'''독일의 반휘티히 공작''' || || 공황 || || |||| '''결과''' || || 멸망 ||'''국치, 분열''' ||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국가 멸망/원인, version=1651)] [[분류:정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